1963년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백남준은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번째 개인전
«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을 진행합니다.
이 전시는 텔레비전을 재료로 한 예술이라는 색다른 시도로
« 비디오 아트 »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적 의미를 갖지만
무엇보다
이 전시에 온 관객들은 입구에 걸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잘린 소머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소는 눈을 뜬 상태로
마치 관객들과 눈맞춤이라도 하려는 듯한 느낌인데요
사람의 키높이정도에 걸어 놓아서
전시에 들어 가려던 관객들은
이 머리를 피해 몸을 최대한 낮추든지
또는 옆쪽 벽에 바싹 붙어야 했습니다.
충격적인 광경인데다
도살된 소머리에서 풍겨나오는 악취 때문에
동네 주민들의 신고가 경찰에 잇따랐고
결국 철거되어야 했었는데요
백남준은 왜 잘린 소머리를 그의 첫 개인전의 입구에다 걸었을까요?
수십 년간 백남준의 작품을 연구한
프랑스의 비디오 감독이자 미술/영화 비평가인
前파리 8대학 교수 장 폴 파르지에는
백남준을 « 전자 무당 »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의 예술의 뿌리에
샤머니즘이 있다는 것인데요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하나의 테마로 이해할 순 없지만
오늘은 « 백남준은 엘렉트로닉 샤먼 electronic chaman - 전자무당이었다 »라는 주제로
그의 예술적 뿌리를 파헤쳐보겠습니다.
1963년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10일동안 백남준은
그의 첫 전시에서 « 음악 »을 전시하겠다는 구상을 합니다.
또한 관람객들을 맞이 하기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싶었을 텐데요
그는 잘린 소머리를 구해다
입구에 걸었습니다.
여러분 중 혹시
이 사진을 보고
이 사진을 보고 새로운 가게를 열거나 업무를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며
돼지머리를 고사상에 올리는 장면이
금방 떠오르신 분 계실까요 ?
백남준은 자신의 첫 전시이면서
비디오 아트라는 분야를 창시하는 아티스트로서 하는
« 첫 출발 »에
한국의 돼지머리를 올린 고사와 같은
어떤 제의적, 제사와 같은 퍼포먼스를 기획한 것이었죠.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는 기원을 하며
미지의 신에게 말을 거는 샤머니즘적 행위예술이었죠.
왜 돼지머리가 아니고 소머리인 것인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그 지역에서
소머리가 더 구하기 쉬웠을거라 추측해봅니다.
소머리를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듯한 모습이
왠지 장사라든지 어떤 수익활동을 시작할 때 하는 행동같지 않나요 ?
우리는 백남준의 예술을 말할 때
그의 파격성과 개척정신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에게 각인된 뿌리깊은
상업적 마인드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1985년 7월 4일,
(서울) 동숭동의 한 음식점에서
친구이자 수필가인 이경희 작가와 나눈 대담을 보면 그는
우린 매일매일 장사거든요
예술이라도 말입니다.
뉴욕에서의 우린 생존경쟁이니까
객관적인 예술평가는 없어요.
존 케이지나 머스 커닝햄은
만나야 할 현실적 필요가 있었고
즉, 예술적으로 그들과 장사관계나 교환관계거든요.
일단 뉴욕에서 예술의 경쟁이 시작되면
그건 장사와 마찬가지예요.
24시간 자기 것만 해야 되는 거죠.
1963년 당시 31살의 나이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에게
고사를 지내는 듯한 어떤 퍼포먼스는
마치 단팥빵의 팥처럼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겼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강한 상업적 마인드와 동시에
샤머니즘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
우리는 그의 집안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남준은
1932년 일제 강점기에
당시 국내 최대 섬유 회사인
태창방직을 운영하며
홍콩을 오가는 무역상
백낙승의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내 손꼽는 재벌가 아들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겠죠.
19세기 초부터
선대로부터 비단 가게를 물려받아
일찍부터 큰 부자가 되었던 백윤수의 4형제 중 막내아들이
바로 백남준의 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 백윤수는
1905년 종로에 ‘백윤수 상점’을 설립하여
청나라 비단을 독점 수입 판매하여
급성장하였는데요.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성은행의 자본금이
100만원이었을 당시
그의 재산이 그 3배에 달했다 하니
정말 어마어마한 부자였죠.
무역일을 했던 백남준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공식여권을
6번째로 발급 받은 사람이고
7번째가 바로 백남준이었다고 하니
정말이지 손 꼽을만한
거상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 대대로 큰 사업을 해오던 환경이
큰 몫을 했고
또한 백남준의 어머니는
사업의 번영과 집안의 평안을 위해
매해 10월이 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를 백남준은 앞서 인용했던
이경희 작가와 나눈 대담에서도
확인시켜줍니다.
어려서였지요.
초등학교 때였을 거에요.
굿할 때 무당이 추는 춤을 봤고…
그때 무당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으셨나요?
신기가 난다든가 하는 ?
아뇨. 그때는 미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어요.
집에서 1년에 한 번씩은 꼭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니까 볼 수 밖에 없었죠.
밤부터 새벽까지 밤새도록 소리 내고 춤추니까
안 볼 수 없어 봤던 것이지요.
어린 백남준은
밤새도록 춤을 추는
무당의 굿판을 지켜보며
한국 특유의 무속 문화를 체험했고
이것이 머리에 크게 각인되었습니다.
백남준의 아내 시게코 쿠보타는
백남준이 굿을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 영감을 얻는 소재로 삼았다고 밝힙니다.
그가 무대 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고
샬럿 무어맨 Charlotte Moorman과 함께 공연하는 순간을 볼 때면
백남준은 영락없이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고백합니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것이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
그렇습니다.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중개자가 되어
대중들과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계와의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비디오 아트는
여러 대의 tv화면을 통해
다양한 삶의 일면을 각각 보여주기도 하고
한번에 합쳐져 그룹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남준의 메가트론/메트릭스 입니다.
관객들은
관객들은 다양한 장면을 각각 보여주는 화면이
분리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다른 현실
다양한 세계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거죠
현재 나의 세상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각각의 개별적이었던 것들이
일사분란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세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모두가 하나로 나아갈 수 있는
또다른 세계도 가능함을
암시하여 알려줍니다.
그는 축제를 열어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무당 같은 예술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1984년 중앙일보와의 귀국 인터뷰에서
자신을 대중과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연결끈으로서,
또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무당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히죠.
예술은 매스 게임이 아니라
페스티벌
잔치
즉 굿입니다.
나는 굿장이죠.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게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어요.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입니다.
페스티벌
잔치의 개념
모두가 춤을 추고 즐길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지휘하 듯
굿장이 되려 한 백남준의 예술정신은
니체가 « 비극의 탄생 »에서 말한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과 축제, 황홀경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를 열어
술 마시고 춤추며
카타르시스에 이르러
자연과 인간이 물아일체가 되는
화해를 하는 장을 마련하였었습니다.
백남준은
자신이 대중이 소리를 지르고 춤추게 하는 광대가 되어
디오니소스적 축제의 회복을 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한국적 샤머니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죠.
층층이 쌓인 tv들이
제사상에 올려진 제단의 음식과 닮지 않았나요 ?
tv에서 나오는 반복되는 음악과 소리들이
굿을 할 때 들리는 북소리처럼 들리진 않으셨나요 ?
백남준은
독일의 행위예술 아티스트 요셉 보이스를 떠나 보내며
굿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하며
정신적 쌍둥이로 불리며
예술동업자였던 요셉 보이스 또한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했었는데요
예를 들자면
1965년에 선보인
«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가 있습니다.
얼굴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 쓰고
죽은 토끼를 안고
약 2시간 동안 미술관을 돌며
토끼에게 웅얼거리며
그림을 설명하는 퍼포먼스였죠.
독특한 정신세계는
백남준과 일맥상통합니다.
보이스는
2차 세계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했을 때
크리미아 반도에 추락하여
당시 유목민인 타타르인들에 구조되어
그들의 샤머니즘적 의식에 매료되게 되었었는데요
파격적인 예술관,
샤머니즘과의 결합 등
공통점이 많았던 절친한 친구 보이스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자
1990년 여름 백남준은
그를 추모하며
직접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무당이 되어 굿을 하였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다시 만나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굿을 통해
백남준은
백남준은 예술적, 정신적 동료였던
보이스를 다시 만나
편안한 안녕을 빌어줬을 것입니다.
백남준은
일생 동안 실험적이고 극단적인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로
사람들을 쇼크에 빠지게 하고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몇몇 인터뷰에서
자신은 « 미친 한국인 crazy Corean »으로
기억되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오늘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예술적 정신과 의도를
샤머니즘
전자무당의 개념으로 접근해보았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댓글을 통해
활발은 소통을 하고 싶습니다.
'잡학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림트에게 황금색은 어떤 의미였는가 (0) | 2020.08.28 |
---|---|
예술적 상상력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 (0) | 2020.07.02 |
하양 흰색 화이트 White 백색의 역사! (0) | 2020.07.02 |
색상 그리고 컬러의 비밀. 널 위한 예술 하울에 이르기까지 (0) | 2020.07.02 |
프랑스 루이 14세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하이힐 (0) | 2020.07.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