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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클림트에게 황금색은 어떤 의미였는가

by 젤다의 모험 2020. 8. 28.

 

19세기말, 오스트리아 빈.

세기말의 혼란과 공포,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흥분과 긴장감 속에

전통적 회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아티스트가 있었습니다.

인물의 얼굴은 현실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하지만

배경과 의상 등은 기하학적 무늬의 장식으로 

대체함으로써

2차원과 3차원의 공간감을 뒤섞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모던한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화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황금빛으로 치장하여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심어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상징주의, 빈 분리파의 주요 아티스트인

구스타프 클림트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그가 사망한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작품값을 

기록하는 화가이기도 하죠.

클림트는 추상이 아닌 구체적 묘사가 들어간 구상회화를 추구했고

장식적 요소를 많이 넣었으며

금박을 덧입혀 작품이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섬세한 기교로 관능적으로 그려진 여성들이

팜므파탈적 유혹을 강하게 어필하는 작품이 많죠.

팜프파탈은 프랑스어로

어떤 치명적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여

파탄에 이끌기까지 하는 여성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의 작품 속 주요 주제인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성

에로시티즘에 집중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숨겨진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앞으로 클림트의 그림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예술을 국제 무대에 알린

빈 분리파 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굉장히 다혈질이며 독특한 성격이었다고 하죠.

일례로, 빈 대학교의 대강당 천장그림으로 의뢰 받고

1900년에서 1907년 사이 그렸던 « 철학, 의학, 법학 »은

발표되자마자 포르노그라피 같다거나

변태적 취향이 과장적으로 표현된 퇴폐미학이라는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그때 대학 측에서 작품을 거부하고 대학의 대강당보다는

갤러리에 영구 소장할 것을 결정하자 격분하여

작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권총으로 직원을 위협하여 

교육부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도 있죠.

결국엔 후원가의 도움을 받아 세 작품을 돌려받긴 했지만

이 작품들은 1945년 나치의 군대가 퇴각하면서 

저지른 방화로 불타 없어지고

현재로선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각각의 작품들은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요,

시간관계상 이 작품집중탐구는

차후 다른 영상으로 자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 철학, 의학, 법학 »에서 본 바와 같이 생전 클림트는

삶과 죽음이 얽힌 감각적인 에로티시즘(관능성)의 주제로,

데생, 회화, 장식미술, 석판화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당시에는 극과 극의 대조되는 반응을 받았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퇴폐적 미학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는 그의 예술적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죠.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슷한 시기 활동한 

체코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 Adolf Loos는

그의 책 ‘장식과 범죄 Ornament and Crime(1913)’에서

«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들이 이 에로티시즘, 

관능미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에곤 실레의 폭력적이고 절망적인 것과 다르며,

피카소의 냉소적인 것

뚤루즈 로트렉의 광기와는 다른 것이죠.

클림트는 앵그르나 마티스의 

세련되고 우아한 에로티시즘입니다.

에로티시즘이 없는 클림트의 작품은 생각할 수 없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의 일관된 취향을 증명해줍니다.

그의 독자적인 에로틱함과 미학적인 취향은

도발적인 포즈의 묘사와 인물들의 표정과 구성

장식적 디테일에서 증명되지만

그의 작품은 결코 잔혹하거나 저속하지 않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금세공일을 하던 에른스트 클림트의 

두번째 아이로 태어나

빈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구요(1876-1883),

빈 미술사 박물관의 안뜰 장식에 참여하면서

장식미술가로서 데뷔했습니다.

1883년 금세공사였던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Ernst Klimt와

친구였던 프란츠 마치 Frantz Matsch와 

함께 공방을 만들고

빈의 부르주아들의 

저택의 벽이나 천장 장식 일을 많이 했었죠.

10여년간 장식미술가로서 그는 큰 인정을 받았고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클림트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스타일의 작품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클림트는 기존의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미술의 부흥에 

참여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죠.

그에 의하면

예술은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고

기존에 확립된 예술과 학술주의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는 1890년대 초 자신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 Emilie Flöge를 만나고

빈 상징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장식미술가로서 많은 주문을 받고 있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1898년 빈 분리파 그룹에 참여합니다.

그들의 슬로건은 

‘각 시대에 맞는 예술, 모든 예술에는 자유를!’ 이었죠.

분리파 그룹의 첫번째 전시회의 포스터를

 그리기도 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미술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고

신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대형의 혁신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습니다.

비잔틴 모자이크의 금세공 기술을 차용하여

금을 주요 색상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스타일을 확립시켰죠.

1898년 그는 빈 분리파의 

두번째 전시회의 포스터로 사용될

팔라스 아테나 Pallas Athena를 그립니다.

그림을 보시면 전사의 의상을 한 아테나 여신의 얼굴 아래

고대 시대 상상의 인물인 고르곤

눈이 마주치면 누구나 돌이 된다는 무서운 존재가

마치 목걸이 장식처럼 자리하고 있는데요.

이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고전적 표현방법을 차용한 것으로

여성이 가진 신비한 힘에 대해 강조하고자 하는

클림트의 의도가 엿보이는 설정입니다.

이 작품에서 여신은 왼손에 창을 들었고

오른손에 승리를 의인화한 니케상을 들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클림트가 이 아테나 여신을

빈 분리파의 수호신적 상징으로 그린 것으로 

해석하고 있죠.

어둡게 그려진 뒷배경은

고대시대의 꽃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바다의 신인 트리톤과 

헤라클레스의 전투장면입니다.

고전 아카데미즘 미술과 싸우는 빈 분리파의 모습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아테나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니케  Nike상은

다음 해인 1899년 누다 베리타스에서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클림트의 그림에서

여신 또는 팜므파탈의 모습을 한 강력한 힘을 가진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는 클림트가 여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취향적 신념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클림트가 1899년 완성한

세로 252, 가로 56.2cm의 대형 크기의 이 유화작품은

유화작품은 누다 베리타스 Nuda Veritas 

(벌거벗은 진실)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붉은 머리와 음모, 초록색 눈을 한 나체의 여자가

거울을 들고 서있는데요

발 밑에는 뱀이 그녀의 발을 휘감고 있고

배경으로는 물을 표현하는 듯한 푸른색의 곡선들이 

휘감기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윗 부분에 쓰인 문구인데요,

이 인용글은 독일 철학자 쉴러가 쓴 것으로

“만약 당신이 당신의 행동과 예술로 

모두를 즐겁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소수를 만족시켜야 한다.

다수를 만족시키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클림트는 예술가가 당대의 시류에 부합하여 

모두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소수를 만족시키는 

선택을 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타성에 젖어 늘 해오던 방식을 고수하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술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으로 본 것입니다.

승리의 여신인 니케로 해석되는 이 여성은

거울을 자신을 향해 들고 있지 않고

감상자를 향해 비춰 들고 있습니다.

당시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돌아보고

진취적인 새로운 미술을 하라는 경고를 하는 듯 합니다.

이렇게 클림트 그림 속 여성들은

감각적이면서도 강력한 파워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01년 완성된 ‘유디트와 홀로페네스’를 보면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유디트가 반나체로

황금빛 배경 속에서 자신감 충만한 얼굴로

감상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유디트(1599-1602)는

겁 먹었으며 두려워하고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클림트의 유디트는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관능적인 포즈로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편

패자가 된 홀로페네스는 아랫쪽 모퉁이에서

얼굴의 반만 살짝 보이는 형태로

그 승자와 패자의 대조가 적나라한 그림이죠.

클림트의 작품에서 대다수 여성은

남성에게 두려움과 욕망을 동시에 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유디트의 두번째 버전에서도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한 반나체의 여성이

잘려진 남자의 머리를 무심한 듯 들고 걷고 있습니다.

표정은 뇌쇄적이며 가슴은 드러낸 상태로

치명적인 그녀의 성적매력을 드러내고 있죠.

클림트 작품에서 보이는 에로시티즘은 

예술적 신념으로까지 보입니다.

1905년의 “여인의 세 단계” 작품에서는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요.

당시 43세였던 클림트는

인간생명의 노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배경은 깊이가 없고 2차원적이며

감상자들은 세 명의 인물에만 집중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인 젊은 여성에게 

평화스럽게 안겨 있으며

젊은 여성의 머리 주위에는 봄을 상징하는

꽃이 가득 합니다.

밝고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희고 탄력있는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과 달리

오른쪽의 노년기의 여성은

피부가 처졌고 배는 부풀어 올랐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배경 역시

노년기 여성은 정적이고 검은색이 섞인 반면

아이와 젊은 여성의 배경은 푸르고 화려하며

무언가 자유롭게 흐르는 듯한 

유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클림트가 좋아했던 주제 중 하나로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순환

죽음과 새 생명의 교차는

1903년과 1907년 희망이라는 작품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클림트는 그의 특징적 작품 성격 중 하나인

장식적 요소를 화려하게 집어넣어

임신한 여성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서양미술에서 비교적 보기 드문 주제였죠.

작품 속 주인공은 육체적 사랑의 화신이며

다산의 알레고리입니다.

가슴을 드러낸 임신한 여성의 옆에

죽음의 상징인 해골이 얼굴을 드러냅니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희망찬 얼굴을 한 

여성의 배경에는

일그러진 표정의 죽음과 불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늘 해오던 방식처럼,

클림트는 육체적 행복의 충만함을 표현한 이 여성을

에로틱하게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삶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위협은

언제나 공존한다는 메시지를 심었습니다.

1908년경 시작되어 1915년 완성된 « 죽음과 삶 »에서는

이 삶과 죽음의 공존과 대비, 끝없는 순환이

더 심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는 죽음과 삶을 대비시켜 모던하게 그려내면서

에곤 실레와는 달리 죽음의 모습에 위협을 느끼기보다

희망과 화해의 메시지를 소개하는 듯 보입니다.

오른쪽에 모여있는 인간들은 왼쪽에 다가온 죽음을 

무시하는 듯 보이죠.

클림트는 죽음 옆에서도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을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한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온전히 부정적인 메시지만 담지는 않았습니다.

삶과 죽음,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하지만

클림트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역시

« 사랑 »입니다.

그 대표적 작품이 키스죠.

클림트의 황금시기에 속하는 키스는

빈 아르누보 예술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클림트 작품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입니다.

금색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실제 금 뿐만 아니라 은과 플래티늄도 썼다고 하는데요.

1907년에서 1908 년 사이 그려진 이 작품은

거의 추상적인 장식으로 뒤덮인 

남자와 여자를 그렸습니다.

꿈 같고 비현실적인 배경 속의 키스하는 커플을 

그림으로써

클림트는 사랑의 달콤함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패턴은

아르누보 스타일과 예술 및 공예 운동의 스타일을 

유기적으로 섞었고

평면의 2차원과 입체의 3차원이 뒤섞여 있어

그림을 보면 공간감에 있어서 시각적 갈등을 불러옵니다.

다양한 꽃과 식물,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된 공간 속에

반사되는 반짝임으로 인해

마치 두 사람이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에서

따왔다고도 추측하는데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를 잃은 오르페오는

지하의 세계까지 쫓아가 아내를 되찾아오지만,

햇빛이 보일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돌아봐

아내를 잃고 마는데요,

이 작품에서 여성이 약간 반투명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황홀함과 달콤함을 이야기 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 순간의 비극적 상황을 

묘사했다는것이죠.

클림트는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한 적이 없으므로

추측은 추측일 뿐입니다.

이 작품이 빈 대학의 « 철학, 의학, 법학 »을 그리고

큰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후 그린

바로 다음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림트가 자신의 작품들이 퇴폐적이라거나

 나쁜 취향이라는 비난에 대해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린 작품으로써 

대답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겠습니다.

2015년에 개봉한 우먼 인 골드는

클림트의 작품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가

나치에 의해 도둑맞고

작품의 주인공의 조카가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을 되찾는 소송사건을 그렸습니다.

클림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영화를 한번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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